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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노트(Work Note)

정서인(정희정) 작가 노트

태운 한지가 아주 얇게 겹겹이 붙여져 한지가 겹쳐져서 보여주는 효과와 불이라는 강렬한 소재가 한지와 만나 태워져 소멸하는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새로운 선과 이미지가 생성되는 작업을 하고 있는 작가이다. 소멸과 생성의 과정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자연과 세상의 순환적 이치의 과정을 태워서 표현하는 방법으로 작품을 제작함으로써 지필묵을 대체하는 또 다른 표현방법으로 모색해 나가고 있다.

 

회화에서는 종이의 여백을 채우며 형상을 입혀 가지만 나의 작업은 태워서이를 거스른다. 태움은 비움의 소멸을 말하는데 역설적이게도, 그 태움은 모여 형상으로 나타나다. 탄 종이가 그대로 형상을 만들어 회화에서의 종이의 주도성을 부각한다. 손을 움직이며 종이를 태우고 풀을 칠하고 다시 종이를 붙이는 수공을 반복하면서 생각을 덜어내고 내가 바라본 풍경의 모습을 캔버스에 채워나간다. 겹겹이 붙여가는 한지의 겹은 작업적 생각의 사유가 축적되고 종이의 빈 면에서부터 한정된 캔버스에 깊이를 더하며 심적 공간을 확장해 나간다. 나에게 향과 그을린 한지는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사고가 이루어지는 성찰의 공간이다.

 

자연이라는 곳을 생성과 소멸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공간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공간이자, 한정되지 않은 유한함과 무궁한 가능성을 간직하는 공간이다. 생명의 삶과 죽음이 담긴 매순간 변화무쌍한 역동성을 가진 대상이다. 자연을 특히 좋아하는 나는 자연스럽게 자연의 이러한 역동성을 태워진 한지를 꼴라쥬하는 방법과 접목하여 산수를 표현하게 되었다. 풍경화는 실제 풍경을 그렸다 하더라도 시각적인 사실 묘사가 아니라 경치에 비추어 마음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의 작업에서도 실제 풍경을 보고 그것을 그래도 형상을 구현하는 것이 아닌, 함축하여 보여주고자 하는 부분이 더욱 부각되는 방식을 취하였다.

 

또한, 태워져 생긴 미묘한 선의 변화를 통한 나의 시야에서 걸러진 정제된 과정이 담긴 시선을 그림에 담는다. 종이를 태워 선을 만든다는 것은 완전한 우연성과 동시에 철저한 계획성을 갖추어야 한다. 불을 종이에 대는 처음에는 어떠한 의도된 형상을 추구하지만, 그 결과는 의도되지 않는 다양하게 태워진 모양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각각의 조각은 미묘한 톤과 얇고 예민한 선의 변화를 찾을 수 있다. 종이가 태워져 생겨난 선은 처음에는 의도된 변화이면서도 동시에 의도치 않은 선의 결과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두 가지 계획성과 우연성이라는 두 가지의 내재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의도하였든 의도치 않았든 간에 생겨난 선은 화면 안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구성 요소로 작용한다. 태워진 흔적이 모여 형상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재료 사이의 의존도가 붓으로 그리는 그림보다 높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불이 주체가 되어 한지라는 지지체를 만나 태우게 될 때 향과 라이터의 불은 함께 존재하여 가시화되는 것이다. 동시에 불은 다양한 의미를 응축하여 표현할 수 있는 물질적 지지체로 사용되고, 단순한 물질성을 넘어 소멸과 생성의 의미가 결부되어 태우는 행위 자체에서도 순환 자체의 의미를 고찰하게 된다.

 

태운 선이 모여 이미지의 형태를 만들어 나가기 때문에 불로 태우는 행위가 완전한 사라짐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들이 모여 다른 생성 원리로 작용하기 때문에 완전한 의미의 태움이라고 정의 할 수 없다. ‘불로 태우다라는 것이 결국 사그라져 재가 되고 없어져야 하는데, 중간 지점에서 의도적으로 멈춘다. 결국 완전한 의미의 태움이 아니기 때문에 본인의 작품은 멀리서 보일 때 태웠지만 태운 것처럼 보이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와서 작품을 보았을 때, 태운 선과 종잇조각을 꼴라주하여 만들었음을 알게 된다. ‘태우다라는 의미가 태어나다라는 의미로 변환되는 과정이 나의 작업의 중요한 맥락으로 작용된다.재현된 이미지는 동양적 시점으로 그려진 산수풍경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분히 회화적인 기법이 어우러져 재조립되고 반추하여 본인의 기억된 부분을 중점으로 골격, 산세, 중첩, 자연의 순환 원리의 개념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최근 나는 이러한 풍경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태워짐을 이용해 화면을 만들어내는 회화작업과 함께 불로 태운다는 행위의 의미에 집중해 태워진 형상 자체가 드러나 무언가가 되는 입체물을 제작하여 작가와 관객을 연결고리가 될 매체로써 확장시켜나가고 있다.